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쪽 눈을 잃게 되면서, 나는 ‘보는 행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사고 이전에는 눈을 뜨고 빛과 사물을 보고, 글자를 읽는 등의 행위가 소중하다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의 경우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닥쳐오는 치열한 일상과 과제들에 눌려 있었을 뿐, ‘보는 행위’ 자체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눈을 다치기 이전, ‘보는 행위’는 내게 괴로운 숙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는 것은 곧 믿는 것’이란 오랜 구절이 있다. 나는 종종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내 눈으로 봐야 알겠어. 직접 보지 못하면 못 믿어.”라고 말하곤 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확인한 정보만을 현실로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주장이 핍박받아온 것도 그 이유가 클 거다.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보통의 인간에게 시각 정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의 보편적인 투영과 같은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란 표현 말이다. 보통 가장 아끼는 소중하고 또 순수한 대상 (이를 테면 어린 자녀 등)에게 위의 구절을 덧붙이곤 한다. 눈에 아주 작은 먼지가 들어가더라도 심한 통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 몸의 고통을 참고 내어줄 만큼,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눈’이라는 매개를 사용한다. 그만큼 ‘눈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감각기관이기 때문이라.
아예 못 보게 된 것도 아니고 한쪽 눈을 잃었을 뿐인데도, 내 삶의 상당한 것이 바뀌었다. 빛의 양이 적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면, 한쪽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가 제한되며 그 외 청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기관이 예민해진다. 어쩌면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진화시킨 본능일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나는 극도로 팽창된 다른 감각들이 불편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각장애인들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 또한 같은 입장이 되었을지 모르는 그들의 삶. ‘보는 행위’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들은 어떤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럼, 반대로 그들의 이웃인, 보는 기능이 멀쩡한 우리들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을지를. 내가 그동안 두 눈으로 살면서도 보지 못한 세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윙크의사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단계, Next step (0) | 2023.01.02 |
---|---|
새해 (0) | 2023.01.01 |
인생의 최적화, 메일함 정리부터 (0) | 2022.12.27 |
사고 소식 알리기 (0) | 2022.12.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 (0) | 2022.1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