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여느 때처럼 힘든 하루였습니다.
당직서며 날밤을 꼬박 새웠고, 새벽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콜을 받았습니다.
제때 끼니를 챙겨 먹은 게 언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 얼굴을 본 것도요.
힘듭니다. 지칩니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이 숨이 가쁘고 치열합니다. 병원에서 일하지만 아파도 병원 갈 엄두를 못 냅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고, 쉴 생각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의지해 힘겹게 숨을 이어가는 환자 곁을 차마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사국가고시를 합격하고, 인턴부터 시작해 내과 레지던트가 되었습니다.
매 순간 다짐했습니다.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고 살리는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요
Do no harm, 환자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 학생 시절부터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그런 젊은 의사들이, 제 목숨처럼 돌보던 환자들을 떠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부도, 병원도, 젊은 의사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키워야 할지 관심이 없습니다.
지방의 병원에는 왜 의사들이 부족한지
내외산소라 부르는 생명을 다루는 과들이 왜 기피대상이 됐는지
소명과 사명이라는 의사의 덕목이, 왜 이젠 바보 같은 헛된 꿈이 됐는지.
엉망인 의료체계를 만들어 놓고도, 정부는 아직도 쉬운 길만 찾으려 합니다.
제대로 배우고 수련 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은 대한민국엔 없었습니다.
숫자만 늘리는 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무턱대고 급여화 해주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국민을 위한다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한다면, 눈 가리고 아웅식의 해법이 아닌, 진짜 해답을 찾아 주십시오.
우리 전공의들에겐 병원이 일터이자 쉼터이고, 환자들이 가족이자 스승입니다.
거리로 나가느라 내일은 못 올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말하던 제게 웃어주던 환자분이 생각납니다.
지독한 병마로 뼈만 남은 몸을 일으켜 잘 다녀오라는 인사에, 죄송함이 앞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오늘이 지나면, 저희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아픈 환자 곁을 밤새 지킬 겁니다.
불 꺼진 병원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외로운 환자들과 기꺼이 함께 할 겁니다.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떳떳하겠습니다.
그 힘들고 따뜻한 모습이 헛되지 않게, 진실 되고 올바른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죄송하고 송구한 마음을 한 켠에 둔 채, 이 자리에선 크게 목소리 내겠습니다.
여기 있기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젊은 의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환자 곁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떳떳한 의사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전국의 1만 6천여명 전공의들이 병원 대신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8월 7일, 내과 전공의 서연주 올림
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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