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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끝맺음과 새로운 역할 2년 간의 소화기내과 펠로우 수련 과정이 끝이 났다. 얼굴뼈가 깨지고 한쪽 눈을 실명하는 사고를 겪고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여섯 번 반복된 전신마취 수술과 세 번의 치열한 복귀, 두번의 거절 끝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생각해보면, 참 고집스럽고 독한 과정이었다. 1년간 동고동락한 동기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2년차로 남아 후배들과 또다른 1년을 보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선택에 책임지며,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 이었다. 그 끝이 어떨지 마음 속으로 백번도 넘게 그렸지만, 지금과 같은 혼돈은 예상하지 못했다. 남겨진 이도, 떠나야 하는 이도, 못내 아쉽고 참담하다. ‘이제 어디로 가니?’ 라는 질문에, 곧 다시 환자복을.. 2024. 3. 1.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왜 그 때 그렇게 울음이 터져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들었던 병원에서 전반기 인턴을 마치고, 진료실에 감사 편지를 전하러 갔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바쁘게 환자들이 밀려오는 진료실에서 울음이 터진 절 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몰라 하시며 건네주신 ‘핸디 선풍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위안이 되었는지요. 외래 끝나고 연락할테니, 일단 얼굴에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라던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사랑을 모두 느꼈습니다. 의사 면허를 따고, 긴장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한 의사로서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의무원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에도, 선생님께서는 인턴 의사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불러주며 진심이 담긴 관심과 애정을 담아주셨습니다. 힘든 일은 없는지 걱정하고 챙겨주시는 모습에, 모든 것이.. 2024. 3. 1.
나의 슬픈 최선, 필수의료 “엄마, 엄마 나 보여?" 중환자실 면회를 온, 내 또래의 딸 보호자가 의식이 혼미해진 환자를 소리쳐 흔들며 부른다. “지..혜야..” ‘엄마’라는 소리를 들은 환자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황달로 노래진 눈을 딸에게 겨우 맞춘다. 수염이 덥수룩 한 남편 보호자의 눈시울이 동시에 벌개진다. 오랜 간병으로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내가 1월에 수술 받으러 가기 전까지는, 혼자 입원해 있던 환자이었다. 51세의 나이에, 진행성 간암으로 마땅한 치료를 찾지 못했고 경제적 상황도 좋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새, 상태가 손쓸 수 없이 나빠졌고, 콩팥 기능마저 악화 되며 3일 전 중환자실로 이실했다. 보통의 병원 상황이었다면, 적극적인 투석과 삽관 등의 치료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설득 했을 텐데, 그럴.. 2024. 2. 27.
서울의 봄 #서울의봄 을 최근에야 보았다. 2023년 연말에 개봉해 누적관객수 천삼백만이 넘은 영화다. 현 정권의 폭탄 같은 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증원 발표 후 전공의들의 임시대의원총회가 새벽까지 이어지던 날이었다. 여러 모로 마음이 혼란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던 밤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일었다. 파워 게임에서 밀려 정의와 원칙이 손쓸 수 없이 무너지는 과정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의 정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으나, 역사가 말해주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배한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사실. Winner takes it all.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합동수사본부장 전두광(배우 황정민)과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배우 정우성)이 대치하는 장.. 2024. 2. 16.
그린북 Green book 새해에 수술을 받고 방문한 외래 진료에서, 또 다시 새로운 수술 일정을 잡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퇴원한지 얼마 안 되어 눈물이 줄줄 흘렀기 때문이다. ‘눈물길이 막혔구나.’ 예상은 했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제 7번째 전신마취 수술이 될 터였다.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를 자꾸 반복하고 있는 거 보면, 함부로 ’마지막이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가 보다. 퉤퉤퉤 사실 최근 수술 후 몸도, 마음도 지쳐서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약을 바르려고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새로 난 흉터와 무감각, 부은 얼굴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청룡처럼 앞으로 나아갈 거라 기대한 새해가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탓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갔다. 퇴원 후 3일 째.. 2024.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