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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일기

의사가 된 과학 영재의 배신

by 윙크의사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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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합격자의 의대 이탈에 대한 뉴스가 연일 화제였다. 의대 정원 확대 이슈와 의사 과학자 양성에 대한 토론도 계속된다. 자격이 될지 모르겠지만, 욕먹을 각오와 함께 내가 학창 시절 느낀 바를 꺼낸다.

소개부터 하자면, 나는 일종의 배신자다. 중학교 때 두 군데의 과학영재원에 합격했고, 당시 대한민국 유일한 영재고였던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카이스트 (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 했으나, 후배의 죽음을 계기로, 경로를 틀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내과 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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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가득해 늘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나는, 과학과 생명 활동에 관한 공부가 무척 재미있었다. 영재교육원에서 실험을 구상하고 창의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고, 친구들과 토론하는 과정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한국과학영재학교의 고등과학교육은 여러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고 훌륭했다. 신념과 능력을 갖춘 교수진도 많았고, 지원도 충분했다. 수도권의 그 흔한 학원이나 과외 같은 사교육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비옥한 토양을 딛고 어린 학생들은 자유롭게 놀고 꿈꾸고 학습할 기회를 가졌다.

노벨상을 타면 동상을 세워 준다는 학습동 뒤편의 ‘노벨 공원’은 내게 ‘넘사벽’과 같았지만, 기회를 준 국가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야겠다는 다짐은 잃지 않았다. 내 친구는 꿈이 모교의 화학 선생님이 되는 것일 정도로, 우리는 설레는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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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카이스트에 진학했다.

서남표 총장 시절의 그곳은 참 지독했다. 학과가 정해지지 않은 ‘무학과’로 시작하여 모든 신입생이 거의 동일한 교육을 받았다. 매주 미적분, 일반화학, 일반물리학 쪽지 시험이 요일별로 반복되고, 매주 금요일 자정까지 조별 과제를 제출해야 했다.

뒤처지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빼앗았고, 또 기숙사 추첨권을 박탈했다. 창의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었고, 주변을 둘러봐도 쫓기는 듯한 무표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구실을 다니는 대학원생 선배들은 더 힘들어 보였다. 본인 연구보다는 연구실 과제나 잡일에 쫓기는 일이 더 많다고 했다. 박사 졸업을 1학기 앞두고서, 지금까지 버틴 수년보다 앞으로의 반년을 버티는 게 더 어려워 그만두는 선배도 있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의 성장이 온통 멈춰 버렸다.

2011년의 카이스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알 것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캠퍼스가 얼마나 지독하고 을씨년스러울 수 있는지.

카이스트 학생들은 차례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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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는 ‘영재들의 무덤’ 카이스트라고 대서특필 되었고, 캠퍼스에는 기자들이 진을 쳤다. 입맛에 맞게 추측성 사유를 들먹이며 한국 사회와 과학계를 재단했고, 슬픔과 당혹감에 휩싸인 내부 구성원들은 감히 목소리를 내거나 빠져나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생명과학, 그중에서도 면역과 세포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당연히 과학자로 커 갈 것을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과학과 연구라면 그 꿈을 이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달아 목숨을 끊는 동료들과 마지막에 하늘로 떠난 고등학교 후배의 죽음은
내 생각을 온통 바꾸어 두었다. 나는 어쩌면 그다음, 혹은 그다음 다음이 될 수도 있었다.

새벽녘 텅 빈 장례식장의 후배 영정 앞에 쓰러져 있는 아버님, 나뒹굴던 소주병 틈에서
어린 나는 눈물을 머금고 꿈을 바꿨다. 너 후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뭐 했냐고. 차라리 눈앞의 사람 살리는 일을 하자고, 그게 더 가치가 있겠다고.

평범한 회사원 아빠를 둔 우리 집은 비싼 의학전문대학원 등록금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은 여러 이유로 반대했지만, 형편을 다 알면서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래야 내가 죄책감에서 벗어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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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사과학자 프로그램으로 학위를 받은 카이스트 차유진 박사의 졸업 연설이 화제였다. (https://youtu.be/9l-Dy3d7u28) 레지던트 수련 도중 만난 환자 ‘민지’를 생각하며 힘든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던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과학자가 되는 길의 힘듦과 불안, 고됨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이겨내고 끝내 학위를 완료한 그의 끈기와 노력에 무한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왜 대한민국에서는, 과학자가 되는 길이 그토록 힘들고 쫓기는 일이 되어야 하는가. 왜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은, 현대 과학의 지평을 넓혀 인류의 발전에 획을 긋는, 창의적 인재를 위한 따뜻하고 비옥한 토양이 되어줄 수 없는가.

나는 잘 먹고 잘 사니 즘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원한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부채 의식을 안고 진로를 바꿨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학전문대학원의 비싼 학비를 감당했으며, 젊은 청춘을 당직실에서, 중환자실에서, 환자 목숨 지키는 일에 오롯이 바쳤다.  

물론, 모두가 나와 같은 사고 과정을 거쳐 의대 진학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린 친구들의 눈에도 미래가 보일 만큼 엉망인 환경이라면, 손가락질하고 폄훼하기 보다 척박한 땅부터 갈아엎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내가 배신자라면,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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