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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

한쪽 시력을 잃었습니다.

by 윙크의사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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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시력을 잃었습니다. 

 

2022년의 마지막 가을, 11월 첫 주 주말이었습니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교수님들과 병원 대강당에서 세미나를 같이 듣고, 또 뒷정리를 함께 했던 기억만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날 세미나 이후 급하게 짐을 챙겨 강원도로 내려갔고, 다음 날 아침 낙마 사고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헬멧과 안전 장비를 착용한 상태이었지만, 사고 전후 약 수 시간가량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정확한 사고 상황은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먼저 원주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서울에서 오신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 것부터가 제 기억의 시작입니다. 한쪽 안구 파열과 안면 분쇄 골절 등...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제게 좀 더 편안하고 친정 같은 성모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들것에 실려졌고, 진통제를 달고 이동하는 구급차에서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던 것 같습니다. 

 

이동하는 내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외마디 말 한마디 없이 제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만 계셨고, 저는 그때까지 제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통제 기운에 몽롱해지고 중간중간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저녁때쯤 성모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과 동료 들까지 울음을 터뜨리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과 교수님들, 성형외과 교수님들 또한 누군가의 긴급한 부탁을 받고 제 상태를 살피러 일요일 저녁에 병원에 나와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께서 어찌 제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꼭 보아 달라 부탁해주셨다 하니, 저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큰 은총과 보호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신 교수님들께서는 응급수술을 하는 쪽으로 결정하셨습니다. 마침 진행 중인 수술이 있어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님께서 추가로 방을 하나 더 열어 전신마취를 해주셨고, 밤늦게까지 안과 교수님 두 분이 함께 제 눈을 정성껏 봉합해 주셨습니다. 자정쯤이 되어 수술이 끝날 때까지 소화기내과 교수님께서 자리를 지켜주시고 결과를 부모님께 전달해주셨습니다. 

 

제자가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소식을 제자의 부모에게 전하는 교수님의 마음은 어땠을지요. 응급 수술 후 진통제 기운에 잠이 든 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저희 부모님께선 안 좋은 상황에서도 교수님을 통해 정말 큰 위안과 위로를 받으셨다 합니다. 제게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함께 극복하는 것의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스승님들께 배우고 성장했던 것이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 입이다. 덕분에 제일 속상하고 힘드셨을 저희 부모님도 매우 담담하고 현명하게 상황을 이겨내고 계십니다. 천방지축 예민한 큰딸을 키워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따뜻하고 강한 분들 품에서 자란 것도 제게는 무척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송함을 한 아름 안고 앞으로 더 진심으로 효도하며 살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수술 후 매일 제 상태를 살피고 함께 고민해주는 담당과 의료진들과 타과 교수님들, 본인 일보다 더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친정 같은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과 동료들 그리고 매일 따뜻한 위로와 기도로 함께 해주시는 신부님, 수녀님 들이 있으셔서 저는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보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총합 12시간이 넘는 전신마취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으니, 힘들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극심한 신경통으로 진통제를 찾으며 울부짖던 순간, 붓기와 얼굴 통증이 너무 심해 며칠 내내 먹지 못하고 잠도 앉아서 자야 했던 순간, 매일 괜찮아 보이던 눈 한쪽이 갑자기 혼탁해져 당일로 응급 수술을 들어가기 전 불안했던 순간들이 모두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하지만 시간은 서서히 지나갔고 모든 것들이 조금씩 괜찮아졌습니다. 하루에 네 번씩 넣던 안약을 세 번, 그리고 두 번까지 줄일 수 있었고, 주사 진통제가 필요한 횟수도 점차 줄더니 결국에는 끊고 먹는 약으로 바꾸어도 크게 통증으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진 상태로, 저는 무사히 퇴원도 해서 병원 밖의 땅을 밟고 또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듯, 고통도, 힘든 감정도 다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졌습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고 많은 분이 기도, 응원, 위로로 함께 해주심에, 저희는 어려운 상황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할 수 없는 나쁜 일들이 있지만, 그 와중에도 늘 감사하고 배울 일들이 있다는 건 진짜입니다. 이번 일로 제가 정말 많은 분께 응원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껴,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고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젊은 시기에 맞닥뜨리게 된 귀한 시련이, 앞으로의 삶을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게 해줄 거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5년간 근무하면서 늘 ‘의사’ 입장에서만 여겼던 병원을, ‘환자’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꽤 신선하고 또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앞으로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좋은 의사,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함께 해주신 마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회복하겠습니다. 한쪽 시력을 잃었지만, 그보다 값진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씩씩하게 잘 이겨내어, 이 은혜 두고두고 갚으며 살겠습니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병원 발코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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