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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14

기적 같은 이야기 성형외과 외래 진료실을 방문했다. 3개월 만이다. 작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안구가 파열되어 한 쪽 시력을 잃었고, 올해 1월, 부러진 얼굴 뼈를 붙여 둔 임플란트에 농양이 생겨 다시 입원했다. 올해 3월, 가까스로 의사 본업으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치료를 병행해야 했다. 반쪽은 의사, 반쪽은 환자로 살며, 두 존재 모두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5월, 기적적으로 상태가 좋아져, 의사라는 본업으로 완전 복귀에 성공했다. “교수님, 저, 눈이 떠져요” 양쪽 눈을 모두 뜨고 깜빡이는 나를 보며, 교수님은 “전생에 좋은 일을 했나 보다”고 했다. 그토록 심한 사고 이후, 눈꺼풀이 다시 떠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고 했다. 감사.. 2023. 5. 18.
진정한 행복 “엄마, 나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다친 다음에 진짜 행복해. 나 안 다쳤으면 가족들한테 마음 터놓는 법도 모르고, 집에 잘 오지도 않고, 그렇게 살았을 거야.” “응, 엄마도 행복해. 아빠랑도 더 돈독해지고, 우리 연주도 자주 보고.” 한눈을 잃은 후, 나는 더 행복해졌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진짜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서일 거라고? 글쎄, 모두가 예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불편하다. 심지어는 투병 생활 내내 곁에서 함께 했던 엄마도 모를 만큼. 1. 시야 : 갈가리 찢어진 번개 모양의 지각이 왼쪽 시야에 남아 있어 오른쪽과 겹친다. 겹쳐 보이는 모든 장면은 뿌옇고 번잡스럽다. 찢어진 모양이 꼭 내 눈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2. 감각 : 왼쪽 뺨과 코, 입술까지의 .. 2023. 4. 10.
과거의 기록 기록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는 요즘, 과거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 모아두었던 오래 된 보물 상자를 꺼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결혼할 때 이런 작업을 하던데.. 과거와 달리 외눈박이가 된 나는, 내심 씁쓸함을 다시며 상자를 열어 예전 기록을 뒤적거린다. 예전 기록 속의 나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의심스러울 만큼 현재와 똑같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 완벽주의 성향을 스스로 채찍질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내면의 나 사이의 괴리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깨달음을 주었던 사실은, 그 와중에도 따뜻하고 고마운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는 것. 모든 것이 쉽게 변질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이렇게 가족의 사랑은 한결같을 수 있는지. 한편으로 무심 했고, 또 .. 2023. 4. 4.
새해 새해가 밝았다. 2023년 검은 토끼해, 태어난 후 서른세 번째 맞이하는 새해다. 2022년을 돌아본다. 부천에서 당직 서며 맞이한 새해를 시작으로, 코로나 환자 급증으로 붕괴 직전인 의료 현장을 정부와 국회, 언론에 알리러 다녔다. 또한 코로나에 대한 시민들의 공포와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고자 서울시-청년의사가 기획한 유튜브 라이브 채널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해 2종 소형 면허를 따고 바이크와 골프를 배웠다. 그러다 보니 가까스로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제는 전공의 신분이 아닌 전문의 신분으로 그리운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돌아와 소화기내과 임상강사 수련을 시작했다. 따뜻하고 능력 있는 교수님들께 내시경 술기뿐 아니라 참된 인생 교육을 받은 충만한 시간이었다. 내시경이 익.. 2023.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