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넘어가는 연말, 나는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 막혀, 또다시 한계를 마주하는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그간의 다양한 노력이 무색 하게도, 안구를 받치고 있는 티타늄 임플란트에 엉겨 붙은 염증이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기존 임플란트를 제거하고 다시 넣는 대수술을 감행 하기로 했다. 그토록 무서웠던 가짜눈알 에도 익숙해졌고,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다친 눈이 어느 쪽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점이었다.
1월 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려 준비를 했었다.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혹시나 기술이 해결할 영역이 없을지 궁금했다. 솔직하게는, 구글, 애플 등 실리콘 밸리 굴지의 기업과 스탠포드, UCSF 등에서 일하는 동기들을 만나 시야를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주 운이 좋게도 CES 참석차 미국에 들르신 전 AI 양재허브센터장 윤종영 교수님께서 투어를 시켜주시기로 했다.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안 되겠네요. 수술 합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교수님 저 미국 학회 가야 해요.’ 이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을지. 본인 몸 상태 생각 못하고 집에 가야 한다거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환자들이 바로 나였다. 수술 날짜는 어쩔 수 없는 환자 일정에 맞춰, 학회에서 돌아오는 날 이틀 뒤로 잡혔다. 보호자로 따라온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이런 날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과연 이게 맞는지, 그래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서. 하지만 아무도 정답을 내려줄 수 없었다. 내 몸 상태를 타인이 알 수 없을 뿐더러, 책임질 수도 없는 문제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너무 욕심을 내고 있는 것 같았고, 무리를 감행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려놓기 너무 아깝고 억울하고 아쉬웠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 너무 야속하고 미웠다. 나의 몸와 마음은 완벽하게 따로 놀며, 서로를 약올리는 줄다리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국,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학회는 온라인 참석으로 변경했다. 눈물을 머금고 한 선택이었다. 슬펐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리하고, 지금 밖에 기회가 없는 것에 집중하는 이가 현명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건강은 한번 잃으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영역 이기에 더 조심하고 신중 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나중에 환자들에게도 떳떳하게 조언해줄 수 있을게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은, 인간을 참으로 서글프게 만든다. 노화에 따라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과정이 이와 같을까. 나이가 들며 지적, 경험적 역량은 늘어가는 데, 이를 수행할 신체기능이 떨어지는 데서 큰 괴리감이 생긴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이 아마도 인간의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할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건강해야,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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