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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14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의사로 겨우 복직한지 4일 차, 최근의 CT 경과에 따라 추가적인 전신 마취 수술이 잡혔다. 다시 환자로 회귀하는 정체성에 온통 혼란과 불안을 느끼며, 잠자코 입원 전 검사와 수속을 진행한다. 흰 의사 가운 대신 얇은 분홍 가운을 걸친 나는, 엑스레이와 심전도를 찍히고, 팔을 걷어 붙여 기꺼이 피를 뽑힌다. ‘아씨 진짜 못 해먹겠네.’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자꾸 짜증이 나고 나쁜 말들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힘든 상황을 마주한 나약한 인간은, 뾰족하고 걸걸해지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공간인 병원 응급실에서, 욕설이 난무하게 되는 이유일테다. 그럴 수록 나와 상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배웠다. 콜록 거리며 내 팔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는 임상병리사에게,.. 2024. 1. 4.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에 대하여 삶에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지나치게 되는 아픔이 존재한다. 소중한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엄마는 기막힌 산통을 견뎌 내야 하고 유일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 전에, 남녀는 수많은 가슴 아픈 이별을 거친다. 그 아픔의 크기가 상당해서, 인간은 어떻게든 이를 피하려 애를 쓰지만, 결국 그 아픔을 다 삼키지 않고서는 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아픔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던가. 내게 닥친 이 아픔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되는 삶의 한 굴곡이라면, 두려움에 잔뜩 웅크리고 굳어져 자리에 멈춰있기 보다는 손발이 조금 찢기더라도 충분히 아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리. 그리하여 끝끝내 이 아픔을 모두 지나친 뒤에는, 아문.. 2023. 11. 5.
회전목마 Merry-go-round 다치고 빛을 잃은 눈이 결국 피고름까지 쏟아내고 나서야, 그래서 결국은 수술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주인은 정신을 차린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또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거늘, 자꾸 스스로를 몰고 가는 버릇 때문에 상처는 결국 덧나고 말았다. 내성균이 자라서, 현존하는 항생제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도 없었다. 결국 코뼈를 뚫고, 고여 있는 고름이 흘러 나갈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부서진 안와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금속 임플란트 안쪽으로 고름이 차 있는 상황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외부 물질을 빼고 깨끗하게 씻은 뒤, 새로운 임플란트를 넣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지하던 부위가 워낙 넓다 보니, 빼버리면 얼굴 형태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어 택한 차선책이었다. 제발 그다음의 경우.. 2023. 10. 5.
피눈물 휴가를 가기 전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혹시 몰라 했던 피검사에서도 콩팥 기능이 뚝 떨어지고 전해질 불균형이 나타나, 동료들은 혈액 샘플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혹시나는 역시나. 휴가 3일째 겨우 일어나 아침 7시 스트레칭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동생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친다. "언니 눈에서 피 나!" 황급히 손을 눈에 대서 확인해보니 축축하고 시뻘건 피가 묻어난다. 아찔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직업이 의사인 나조차도, 머리가 하얘져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여긴 베트남이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거울에 나를 비춘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피 나는 눈과 피묻은 손을 사진 찍는다. (신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 2023. 8. 30.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재혁은, 나의 한쪽 어깨와 지팡이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한쪽 눈만 보이는 나는, 혹시나 걸음에 방해가 될까 걱정하며, 우리가 향하는 방향과 땅바닥을 번갈아 살피느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앞을 보면서도 걸음이 익숙하지 않은 나와 달리, 친구는 시각 외의 다양한 감각에 의지한 채 한껏 여유롭고 능숙하게 걷는다. 친구가 한쪽 눈씩 차례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난 뒤, 내내 마음 속에 머물렀던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나 실례일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지만, 왠지 알아야만 했다. 어쩌면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그랬다. 나는 친구에게, 한쪽 눈을 잃고 남은 한쪽 눈 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렵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두렵지 않았다고. 그리.. 202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