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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

피눈물

by 윙크의사 2023.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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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가기 전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혹시 몰라 했던 피검사에서도 콩팥 기능이 뚝 떨어지고 전해질 불균형이 나타나, 동료들은 혈액 샘플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혹시나는 역시나. 휴가 3일째 겨우 일어나 아침 7시 스트레칭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동생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친다.

 

"언니 눈에서 피 나!"

 

황급히 손을 눈에 대서 확인해보니 축축하고 시뻘건 피가 묻어난다. 아찔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직업이 의사인 나조차도, 머리가 하얘져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여긴 베트남이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거울에 나를 비춘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피 나는 눈과 피묻은 손을 사진 찍는다. (신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병원을 갈 수 없다면, 마치 범죄 현장처럼 적어도 영상이나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환자의 말이 진짜인지 증명할 수 있다.) 이후 머리 속은 피 나는 원인을 찾느라 온통 바쁘다.

 

실명한 왼쪽 눈을 수술한 시기는 벌써 9개월이 넘었다. 수술 자리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출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생긴 출혈이거나, 고여 있던 무언가가 악화되어 흘러 넘치는 상태일 것이다. 라즈베리 잼 처럼 진한 색깔로 보아 새로 생긴 출혈일 가능성은 적다. 최근의 컨디션 악화를 고려하면, 염증 악화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단 챙겨온 항생제를 삼킨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마음 속이 온통 불편해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내 몸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끔찍했던 사고도, 한쪽 눈을 실명한 것도, 얼굴 한 쪽 감각이 사라진 것도 받아들였다. 얼굴 뼈가 어긋나 입 안으로 튀어나온 뼛조각도 이제 익숙해졌다. 눈물처럼 삼켜낸 운명이었다. 딛고 일어나, 이제 다시 나의 속도로 달려 보려고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있었다.

 

갑자기 내게 비극이 닥친 것 까지는 괜찮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괜찮았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내 발목을 지지부진하게 붙잡는 예상치 못한 한계를 참을 수가 없다. 나의 가능성을 갑자기 가로막고, 멈추어 주저앉게 만들고, 불가피하게 의지를 자꾸 꺾어버리는 이런 일들을 이겨내기가 어렵다.

 

덕분에 찬란한 휴가의 장르가 갑작스런 잔혹 동화로 바뀌었다. 피로에 지친 언니를 대신해, 로컬 마켓에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사서 들고 온 착한 동생에게 온갖 짜증도 부렸다. 이런 복잡한 마음에도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었던 나는 역시나 모순적인 인간이다. 뒤늦게 솔직히 고백하는 나를, 이해해달라.

 

사실 이 뿐만 아니고 신경 쓰이는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이는 정리되는대로 차차 기록하기로 한다. 귀국하자마자 출근한 나는, 과에 양해를 구하고 안과, 성형외과, 감염내과 진료부터 줄줄이 찾았다. 병원에 가면 이상하리만큼 증상이 말끔히 낫는다. 왼쪽 눈과 눈물길은 깨끗하고 피검사 결과도 괜찮다.

 

사진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선명하던 피는 그럼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싶지만, 일단 지금은 괜찮으니 할 수 있는 것 없다. 불안한 마음이 또 다시 나를 온통 잠식한다. 질병이 무서운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다. 질병이 앗아가는 인간의 총기와 생기, 그리고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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