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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84

흉터 오른쪽 세 번째 손톱은 얼굴을 제외한 신체에 유일하게 남은 사고의 흔적이었다. 얼굴 뼈가 으스러지고 안구가 파열된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손톱을 제외한 팔다리가 멀쩡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당시 충격으로 흐물거리는 손톱이 걸리적거릴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불가피하게 닥친 아픔의 흔적을 어쩌면 본능적으로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능과 효율이 떨어진 인간의 핑계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힘든 일은 담아 두는 것보다 돌파하고 지나가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가시밭길이라 한들, 살짝 찢기며 나아가다 보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니까.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결국 지나간다. 우주의 섭리에 따라 시간은 절대적으로 .. 2023. 3. 14.
투정 아닌 투쟁의 기록 나의 글이, 불행을 당한 이의 ‘투정’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보다는, 불가피한 삶의 시련에 맞서는, 담담하되 치열한 일종의 ‘투쟁’ 기록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결국은 지나갈 인생의 힘겨운 시기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과 결부되어 보편적으로 발생한다. 누구의 삶이나 고되고 어려운 시기가 도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항생제를 맞으러 가는 병원 주사실 풍경만 보아도 그렇다. 갑자기 열이 나는 아픈 아이를 둘러업고 온 워킹맘, 점심 자투리 시간에 양복 차림으로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직장인, 말기 암 상태로 항암제 주사를 맞으러 온 80대 노인 등, 우리는 온통 눈물겨운 삶의 투쟁 한복판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기록은, 개인의 생존을 넘어 보편적인 그대들과 함께 존.. 2023. 3. 14.
“엄마 아빠는 눈이 두 개 잖아!!!!!” 터져버렸다.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았던,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아 꾹꾹 눌러 둔 현실이 설움과 함께 터져 나왔다. 엄마 아빠가 눈이 두 개이고, 나는 눈이 한 개가 되어 버린 뾰족한 현실은 그야말로 차갑고 앙상한 모습이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마치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처럼, 나는 날카로운 끝을 사정없이 휘둘러 부모의 마음을 찌른다. 숨겨 뒀던 폭군의 모습이 드러나는 광경이다. 부모님의 시선은 미래를 향했고, 내 것은 현재에 머물렀다. 적어도 과거에 묶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큰 다행이었다. 부모님은 미래의 내가 차별받지 않기를 바랬고, 나는 현재의 내가 행복하길 바랬다. 사고를 겪은 당사자의 마음은, 지금, 현재, 여기 있는 나를 지키고자 애쓰는데, 엎어져 있는 딸을 외면하고 자꾸 저 .. 2023. 3. 14.
끝이자 시작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끝과 시작은 마치 기차의 분절처럼 네모반듯하게 분리될 것 같지만, 사실은 퍼즐처럼 잘게 나눠진, 실제로는 연속된 조각들의 모음집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지난주에 모 병원 소화기내과 펠로우 송별회가 있었다. 작년 말 다쳐서 실려 왔을 때부터 따뜻하게 날 보살펴주고, 힘들 텐데도 묵묵히 빈 자리를 채워주었던 선배, 동료 펠로우들과 작별하는 자리였다. 함께 시작했지만 유일하게 남아,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동료들을 배웅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고마움과 미안함과 아쉬움이 담긴 나의 소회는 시작부터 울컥거린다. 1. 인생의 큰 변화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2. 다친 저를 가족처럼 아껴주고 보살펴주신 덕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3. 내과 의사로서의 꿈을.. 2023. 3. 2.
관계 Relationship 관계들에 대해 생각한다. 있으면 좋은 관계와 있어도 되는 관계, 없으면 안 되는 관계와 혹은 없어져야만 하는 관계. 삶은 단편적이지 않고 유동적으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은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규정하고 싶은 ‘마음’과 규정돼야 한다고 여기는 ‘강박’ 간에는 일종의 피아식별조차 어렵다. 결코 규정되지 않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크고 작은 고통을 받는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OO 관계 (친구든, 연인이든, 부모-자식이든, 상사-부하든 간에) 는 이래야 한다고 정답 아닌 정답을 정해 놓는다. 감정적, 체력적 여유가 있었을 때는 상대의 보폭에 맞추어 나도 조금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여유와 함께 관계의 유연성 또한 잃어버렸.. 2023.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