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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84

버킷리스트, 산티아고 순례길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는, 조그마한 가정의학과 의원이 있었다. 우리 가족 주치의였던 원장님은, 늘 인자한 미소를 띠며 동네 사람들을 돌봤다. 할머니부터 손녀딸에 이르기까지, 우리 가족은 아플 때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 소식을 전하러 의원에 들렀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입학과 졸업, 그리고 마침내 의사가 되기까지, 나는 원장님과 오랜 시간 안부를 나누며 지냈다. 가벼운 건강 문제부터 무거운 삶의 고민까지, 우리가 나눈 모든 시간에는 따뜻함과 사려 깊음이 깃들어 있었다. 뒤늦은 사춘기와 공허함으로 방황하던 20대 초, “연주야 앞으로 뭘 하고 싶니?”라 물으며 날 지긋이 바라보던 원장님의 눈빛이 생생하다. 본인의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것’이라며, 하고 싶은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 2023. 5. 27.
돈에 대하여 돈에 대한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Multipotent’한 재화이다. 변동성 높은 시대에 담긴 불안함은, 유튜브와 각종 SNS의 ‘돈’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된다. ‘돈’이 개인의 정체성을 증명하며, ‘돈’만이 삶의 성공 여부를 담보한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선택한 이들은 바보 취급을 받고, 결과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헤맬 수 밖에 없다. 삼십대에 한 쪽 눈을 잃으면서, ‘안전’한 삶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한 인간의 ‘안전’한 생존 또한 돈이 필수재로 들어간다. 수술도, 치료도, 회복도, 돈이 있어야 가능했고, 혹은 돈으로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집과 식량은, 안전한 삶에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돈’은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 2023. 5. 27.
기적 같은 이야기 성형외과 외래 진료실을 방문했다. 3개월 만이다. 작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안구가 파열되어 한 쪽 시력을 잃었고, 올해 1월, 부러진 얼굴 뼈를 붙여 둔 임플란트에 농양이 생겨 다시 입원했다. 올해 3월, 가까스로 의사 본업으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치료를 병행해야 했다. 반쪽은 의사, 반쪽은 환자로 살며, 두 존재 모두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5월, 기적적으로 상태가 좋아져, 의사라는 본업으로 완전 복귀에 성공했다. “교수님, 저, 눈이 떠져요” 양쪽 눈을 모두 뜨고 깜빡이는 나를 보며, 교수님은 “전생에 좋은 일을 했나 보다”고 했다. 그토록 심한 사고 이후, 눈꺼풀이 다시 떠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고 했다. 감사.. 2023. 5. 18.
안압이 재진다!!! 안과 진료에 올 때마다 간단한 검사들을 한다. 진료 차트에는 좌안 LP (-) (Light perception, 즉 빛 감지 능력이 없는 상태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함)이라 적혀 있다. 아주 잘 보이게 쓰여 있지만 기계적으로 왼 눈을 가려보라는 검사자도 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왼쪽 눈은 실명했어요. 불 비춰도 안 보여요.”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마음이 온통 다쳤었다. 안압을 잴 때는 더 난관이었다. 눈꺼풀도 감겨 있고 안구가 흐물흐물하니 측정이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내 안압을 잴 수 있었던 사람은, 단발머리를 한 솜씨 좋은 1년 차 전공의 선생님 한 명뿐이었다. 정상 안압은 10~21mmHg인데, 당시 열심히 눈꺼풀을 벌려 겨우 잰 왼쪽 안압은 2mmHg였다. 그 정도로 낮은 .. 2023. 5. 15.
삶 Life, 아름다운 무기 지독하게 치료 받았다. 거짓말 안 하고 왕복 3시간, 막힐 땐 편도 3시간 까지 걸리는 거리로, 매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처음 한 달은 토일 가리지 않고 주 7일을 다녔고, 근무와 병행하면서는 그나마 주 5-6일로 줄여 다녔다. 체력이 약해지고 한 눈 운전이 서툰 나를, 부모님과 동생이 번갈아 태워 다녔다. 1시간 반-2시간 남짓 걸리는 치료시간과 왕복 소요되는 3-4시간을 합치면 하루를 통으로 비워야 했다. 가족들은 시간과 기회 비용을 기꺼이 감내해 주었다. 경치도 좋고 운동도 되니 좋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려 하는 말인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모든 것이 찐사랑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극한 희생과 헌신의 과정이었다.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동안, 거의 모든 끼니는 차에서 해결했다. 나 .. 2023.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