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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 2023년을 넘어가는 연말, 나는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 막혀, 또다시 한계를 마주하는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그간의 다양한 노력이 무색 하게도, 안구를 받치고 있는 티타늄 임플란트에 엉겨 붙은 염증이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기존 임플란트를 제거하고 다시 넣는 대수술을 감행 하기로 했다. 그토록 무서웠던 가짜눈알 에도 익숙해졌고,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다친 눈이 어느 쪽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점이었다. 1월 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려 준비를 했었다.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혹시나 기술이 해결할 영역이 없을지 궁금했다. 솔직하게는, 구글, 애플 등 실리콘 밸리 굴지의 기업과 스탠포드, UCSF 등에서 일하는 동기들을 만나 시.. 2024. 1. 14.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의사로 겨우 복직한지 4일 차, 최근의 CT 경과에 따라 추가적인 전신 마취 수술이 잡혔다. 다시 환자로 회귀하는 정체성에 온통 혼란과 불안을 느끼며, 잠자코 입원 전 검사와 수속을 진행한다. 흰 의사 가운 대신 얇은 분홍 가운을 걸친 나는, 엑스레이와 심전도를 찍히고, 팔을 걷어 붙여 기꺼이 피를 뽑힌다. ‘아씨 진짜 못 해먹겠네.’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자꾸 짜증이 나고 나쁜 말들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힘든 상황을 마주한 나약한 인간은, 뾰족하고 걸걸해지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공간인 병원 응급실에서, 욕설이 난무하게 되는 이유일테다. 그럴 수록 나와 상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배웠다. 콜록 거리며 내 팔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는 임상병리사에게,.. 2024. 1. 4.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죽음은 이슈가 된다. 특히 유명하고 자극적인 스토리일 수록 사람들은 이를 소비하고자 한다. 생에 가까웠던 한 존재와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난도질 하는 이들은, 죽은 이도 평안히 죽도록, 산 이도 평안히 살도록 도통 내버려 두질 않는다. 20대 시절, 가까울 수 있었지만 미처 눈치조차 못 챈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나는 몇 차례나 또래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죽음은 어느덧 삶에서 꽤나 가까운 단어가 되었고, 내과 의사가 된 나는, 타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내는 일을 하게 됐다. 한때는 찬란 했을 수많은 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고인 곁에 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중요한 .. 2023. 12. 31.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 올해를 넘어가는 연말, 나는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 막혀, 또다시 한계를 마주하는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그간의 다양한 노력이 무색 하게도, 안구를 받치고 있는 티타늄 임플란트에 엉겨 붙은 염증이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기존 임플란트를 제거하고 다시 넣는 대수술을 감행 하기로 했다. 그토록 무서웠던 가짜눈알 에도 익숙해졌고,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다친 눈이 어느 쪽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점이었다. 1월 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려 준비를 했었다.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혹시나 기술이 해결할 영역이 없을지 궁금했다. 솔직하게는, 구글, 애플 등 실리콘 밸리 굴지의 기업과 스탠포드, UCSF 등에서 일하는 동기들을 만나 시야를 .. 2023. 12. 29.
나는 나쁜 의사인가 (내과 전공의 3년차 시절 작성한 글입니다) 2주일 전, 우리 파트 1년차 선생님이 내과 수련을 포기했다. 평소 근면성실하고 열심이던 분이었는데, 아마 내과 의사로서 늘 맞닥뜨리게 되는 중환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원인 이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만두게 한 원인을 분석 하고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첫 주는 행정상 휴가 처리를 한 채 다들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나 또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그렇다고 따로 연락해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파트 시니어 로서 할 일은, 그가 맡던 환자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그저 묵묵히 공백을 메꿔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주가 흘러갔다. 2년차 휴가 백을 포함하면 3주 째 차트를 잡고 있다. 그간 벌.. 2023.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