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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Tunnel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지치고 피로한 어머니는 고개가 꺽인 채 잠에 들었고, 마찬가지로 피로할 아버지는 꿋꿋이 운전대를 잡은 채 발을 옮긴다. 뒷좌석에 태운 다친 딸을 위해서라면, 세상 어디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와. 기꺼이 손발이 되어주는 앞좌석의 지친 부모를 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딸. 마침내 터널 끝에 다다르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2023. 6. 11.
의안 Fake eye 처음 간 의안 센터의 아저씨들은 조폭 영화에서나 본 사람들 같았다. 커다란 사람 셋이 좁은 방 구석탱이에 나를 앉혀 놓고, 무섭게 생긴 눈알 덩어리들을 흔들며 마치 장신구를 팔 듯 이거 하면 이쁘겠네- 라고 말한다. 마음대로 하나를 집어서는 이리 저리 돌려 본 후, 부하 직원에게 이거 껴. 하고 명령을 한다. 부하 직원은 그 눈알을 건네 받더니, 씻지도 않은 손으로 대강 물에 눈알을 굴린 후 내 얼굴로 다가온다. 영화에서 흔히 본 고문 장면이 떠올라 나는 어느새 움찔하고 잔뜩 긴장한다. 덩치 큰 그 부하 직원은 힘 빼라며, 내 왼쪽 눈꺼풀을 막무가내로 벌리더니 그 큰 눈알을 와자작 우겨 넣는다. ‘아 거, 눈 아래로 굴려봐요’ 나는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가짜 눈알’을 끼우기 위해, 나의 진짜 .. 2023. 6. 11.
내가 보는 세상, 세상이 보는 나 모든 경험이 새롭다. 불과 6개월 전에 찾아간 장소와 사람이, 지금은 새롭고 다르다. 그 흔한 '작년 이맘때'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나는 그 사이 정상인에서 장애인이 되었고, 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많이 달라졌는데, 세상이 보는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는 외모는 짝눈을 가진 사람 정도로 회복했고, 기능적, 사회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다. 어찌 보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다만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 다행이긴 한데, 가끔은 억울한 마음도 든다. 내가 보는 달라진 시야와 삶의 불편함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남들은 나를 당연히 이전과 똑같이 받아들인다. 나의 달라진 세상에서, .. 2023. 6. 4.
효율적으로 시간 쓰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무작정 쪼개거나 아껴 쓰는 것 말고, ‘현명하게’ 효율적으로 쓰는 것 말이다.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를 제외하고는, 지구도, 달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유기체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한정적으로 느끼는 것은 시간과 체력이다.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한정된 시간과 체력은 나를 선택의 갈림길에 가져다 놓는다. 아직도 내려놓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 인간은, 앞에 놓인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갑자기 당겨질지, 혹은 지연될지조차 모르는 ‘삶의 끝’을 향하는 비행기 시간 전에, 모든 길을 다 가보고 싶은 ‘욕심쟁이 여행자’가 바로 나다.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시간동안 최대한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아보.. 2023. 6. 4.
눈이 떠져요 성형외과 외래 진료실을 방문했다. 3개월 만이다. 작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안구가 파열되어 한 쪽 시력을 잃었고, 올해 1월, 부러진 얼굴 뼈를 붙여 둔 임플란트에 농양이 생겨 다시 입원했다. 올해 3월, 가까스로 의사 본업으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치료를 병행해야 했다. 반쪽은 의사, 반쪽은 환자로 살며, 두 존재 모두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5월, 기적적으로 상태가 좋아져, 의사라는 본업으로 완전 복귀에 성공했다. “교수님, 저, 눈이 떠져요” 양쪽 눈을 모두 뜨고 깜빡이는 나를 보며, 교수님은 “전생에 좋은 일을 했나 보다”고 했다. 그토록 심한 사고 이후, 눈꺼풀이 다시 떠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고 했다. 감사.. 2023.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