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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84

처음인 듯 처음 아닌 해외 여행 2023년, 한쪽 눈 실명이라는 큰 사고를 딛고 새롭게 맞이한 첫 해다. 안개처럼 뿌연 앞날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까, 당시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름의 허황되고 부푼 꿈에 둘러쌓여 있었다. 상실을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자만하였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했다. 하지만 그 새로운 한 해를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마치 주인의 오만을 비웃듯 눈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왔다.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안고, 눈물과 좌절을 애써 감추며, 새해 첫달의 절반을 홀로 입원한 채 보냈다. 명절 연휴 텅 빈 병원을 ‘환자’가 되어 지켰던 시간은, 어쩌면 하늘이 허락한 새해 선물이었다. (‘의사’로 명절 연휴를 병원에서 보낼 땐 너무 바빠 지옥 같았는데..) 스스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며, 폭주 기관차 처럼 달려온 삶을 돌아보았다.. 2023. 9. 18.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인터뷰 내내 따뜻했던, 그리고 내가 썼던 글을 꼼꼼히 읽어 나조차도 기억 안나는 질문을, 꺼내오셨던 인터뷰어가 이런 문자를 보내셨다. 내게도 치유 받는 시간이었기에 흔쾌히 글을 쓰셔도 된다고 답장했고, 보내주신 글을 읽은 나는 그만 길거리에서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변화에 적응했다고 자신하며 의사 가운을 입고 돌아왔으나, 욕심만큼은 안정되지 않은 몸 상태여서 나는 아마 곧 다시 환자복을 입게 될 거다. 그 와중에도 맡은 일에 책임을 다 하는 습성에 기존에 약속된 중요한 발표 2개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내 몸 상태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주말에 찍은 MRI를 들고, 4개나 되는 진료과의 교수님들을 찾아 뵙고 상의하는 과정은 꽤나 지치고 힘겨운 과정이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기도 했고. 또 다시 흔.. 2023. 9. 10.
피눈물 휴가를 가기 전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혹시 몰라 했던 피검사에서도 콩팥 기능이 뚝 떨어지고 전해질 불균형이 나타나, 동료들은 혈액 샘플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혹시나는 역시나. 휴가 3일째 겨우 일어나 아침 7시 스트레칭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동생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친다. "언니 눈에서 피 나!" 황급히 손을 눈에 대서 확인해보니 축축하고 시뻘건 피가 묻어난다. 아찔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직업이 의사인 나조차도, 머리가 하얘져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여긴 베트남이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거울에 나를 비춘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피 나는 눈과 피묻은 손을 사진 찍는다. (신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 2023. 8. 30.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앞이 보이지 않는 친구 재혁은, 나의 한쪽 어깨와 지팡이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한쪽 눈만 보이는 나는, 혹시나 걸음에 방해가 될까 걱정하며, 우리가 향하는 방향과 땅바닥을 번갈아 살피느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앞을 보면서도 걸음이 익숙하지 않은 나와 달리, 친구는 시각 외의 다양한 감각에 의지한 채 한껏 여유롭고 능숙하게 걷는다. 친구가 한쪽 눈씩 차례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난 뒤, 내내 마음 속에 머물렀던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나 실례일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지만, 왠지 알아야만 했다. 어쩌면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그랬다. 나는 친구에게, 한쪽 눈을 잃고 남은 한쪽 눈 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렵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두렵지 않았다고. 그리.. 2023. 8. 27.
8월 16일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한 친구는 작년 8월 16일에, 그리고 한 친구는 올해 8월 16일에 각각 떠났다. 어찌 이런 안타까운 우연이 있을까. 둘 다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던 기둥 같은 친구 들이다. 인간의 삶이 유한 하다는 것을 떠난 친구들을 통해 배운다. 동시에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친구들을 떠올리며 고민한다. 기가 막힌 우연 처럼 자꾸 소중한 이가 곁을 떠나는 슬픈 8월 16일,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된 그들이, 세상에 남긴 따뜻한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부디 내년 8월 16일은 모두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길 바래 본다. 2023.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