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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84

바로 잡으려는 용기 12월이 되고 의안을 48시간 연속해서 끼고 적응하는 연습을 하면서, 눈의 염증이 심해져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또다시 좌절하게 됐었다. 쉰다는 어려운 결정을 한 뒤로 이제는 정말 다 괜찮아진 것 같은 자신만만한 느낌이 들던 시기 였다. 역시 자만한 인간은, 하늘이 가만 두지 않는 구나 싶었다. 앞으로 달려나가고 싶은 정신과, 이를 용납해주지 않는 육체가 서로를 잡아 끄는 줄다리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라는 존재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고군분투가 버거워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다. 갑자기 인생에 닥친 이 모든 상황을 그 흔한 원망 하나 없이 삼켜냈는데, 자꾸만 앞을 가리는 문제들은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속이 꽉 막히고 체한 느낌이었다. 원래 인간 심리가 줬다 뺐으면 불안과 .. 2023. 12. 17.
초기성인기의 발달과제 올해를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지나기 위해 무의식과 내면을 열심히 파고드는 중이다. 정신분석, 심리검사, 상담 등을 다각도로 병행하는데 (과해..), 새롭게 아주 큰 깨달음들을 얻고 있다. 당장 내게 닥친 육체적인 위기들을 물리적으로 회복하고 해결해 가면서 (과연..), 정신적, 심리적 회복의 문제가 남았다.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살았던 초기성인기의 발달과제를 이제야 건드리는 중이다. 전문의 시험 공부 중 누나 생각나는 구절이라며, ‘초기 성인기의 세 가지 발달과제‘에 대한 교과서 캡쳐본을 보내온 승원이에게 따스한 동질감을 느낀다. 역시 또라이는 또라이를 알아보는가. 다른 인간들도 비슷한 고뇌와 고민를 겪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치유와 나아감이 시작된다. 모른척 하고 넘어간다.. 2023. 12. 13.
나를 바꿔야 살 수 있는 삶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이 있었다. 30살에 대장암 수술을 하고 최근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동안의 투병기간에, 자신의 삶을 점철한 단어가 ‘생존’이었다면, 연주는 어땠을까 싶었다며. 말문이 막힌 나는,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생존’이라는 단어를 운운하긴 했지만, 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내 시야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경계에 놓여 있었고, 나의 정체성은 정상인과 장애인의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으며, 나의 역할 또한, 의사와 환자 그 사이 중간 정도에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 어디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한 애매한 경계에 있었다.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보았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운 암 투병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의 시간도 나름 치열 했었는데.... 2023. 11. 30.
마주 하기 뭐든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 현실의 인간세계는 대체로 꽤나 고달프기에, 눈을 질끈 감거나 자꾸 피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것을 믿기도 하고, 현재가 아닌 미래의 것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그조차도 안 되어 지나가버린 과거의 것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 모든 것이 고달픈 지금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작은 욕망이 아닐까. 현실을 온통 피하고 도망 다니던 나는, 다시 하나씩 마주하는 연습 중이다. 눈을 굴리면 티가 나서 앞만 보게 만드는, ‘의안’을 다시 끼기로 한 것이 그 첫번째 시작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하고 싫었는데, 이제는 뭐 꽤 괜찮고 맘에 든다. 역시 많은 경우, 정면 돌파가 답이다. 언젠가 교수님은, 어떤 눈이 다친 눈이냐고, 심지어 의안이 .. 2023. 11. 26.
멈춤의 미학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쉬기로 한 이후에도 나는 왜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한쪽 끝에서는 ‘욕망’이, 또 한쪽 끝에서는 ‘불안’이 나를 양 끝으로 찢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하고픈 것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많아서 파묻힐 정도로 과한 욕심은 독이리라. 진짜 쉬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피눈물 때문은 아니고 사실은 피똥 때문이었다. (좀 부끄럽지만 뭐ㅋ) 수술 후 4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잃을 정도라 화장실에 수건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시뻘건 혈변이 똑똑 나왔다.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수도없이 봐왔던 환자들 사진과 똑같이.. 갑작스럽고 극심한 LLQ (left lower quadrant, 배를 4사분면으로 나.. 2023. 11. 20.